부처님오신날

깨달음의 길이 열린 ‘부처님오신날’

초파일 민속놀이

부처님오신날 '초파일 민속놀이'
부처님오신날 '초파일 민속놀이'
호기(呼旗)놀이

초파일의 민속은 등과 관련된 것이 많았습니다. 신라 이래로 시작된 등에 관한 문화가 초파일과 결합하여 민간 풍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등을 만들고, 걸고, 켜고 구경하는 모든 것들이 민간 속에 녹아 들어 초파일은 등을 켜 온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중요한 명절이 된 것입니다. 바쁜 농사철에 한번 일손을 멈추고 한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초파일은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민속 명절인 것입니다.
'고려사' 공민왕 13년 초에 '우리나라 풍속에 4월 8일이 석가모니 탄신일이므로 집집마다 연등을 다는데 이 날이 되기 수십일 전부터 여러 아이들이 종이를 잘라 등대에 작대기를 매달아 기를 만들고 두루 장안의 거리를 누비면서 쌀이나 돈을 요구하며 그 비용을 삼으니 이를 호기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조선조에도 널리 유행해 '호기는 초파일이 되기 수십일 전부터 어린아이들이 종이를 오려 기를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두드리며 떼를 지어 각 동네를 다니면서 등불을 밝힐 재료를 구하기 위한 비용으로 쌀이나 돈을 구하던 행사였다'고 합니다.
초파일의 연등행사가 종교적인 성격과 더불어 민가의 풍속으로 확실히 뿌리 내렸다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등 초파일

연등놀이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등은 각종 기록이나 민요 등을 통해 볼 때 그 종류가 40여 종이나 돼 초파일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운종가 즉 종로의 등 파는 집에서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이 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이함을 자랑했습니다.
종로에는 이 등을 보려고 사람들이 담벼락같이 몰려들고 등을 사서는 장난하며 놀기도 하고 등대에 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등은 집에서 만들었습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석류 등, 수박 등, 마늘 등등을 달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거북 등, 학 등을 달았습니다.
그 밖에도 잉어나 호랑이, 표범 등 각종 동물이나 과일, 꽃, 어류 등의 모양을 본뜬 등을 달았습니다. 등의 재료는 종이나 붉고 푸른 비단 등을 썼습니다.

등의 종류는 지금과는 달리 퍽 다양했습니다. 수박등, 마늘등, 연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공등, 배등, 종등, 북등, 누각등, 난간등, 화분등, 가마등, 머루등, 항아리등, 방울등, 알등, 봉등, 학등, 잉어등, 거북등, 자라등, 수복등, 태형등, 만세등, 남산등 등이 있습니다. 또 영등이라는 것이 있는데 등 안쪽에 호랑이, 이리, 사슴, 노루 등의 모양으로 자른 종이를 끼워 넣어 등 안에서 회전하게 함으로써 등에서 비추는 그림자를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이 등은 회전등, 주마등이라고 합니다.

등대
등간

열양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가와 관청, 저자에서는 모두가 등간을 세웁니다. 이 등간은 대나무를 연결하여 묶고 그 높이는 십여장이나 됩니다.
등간 위에는 비단이나 면포를 잘라서 꽂으며 깃발 밑에는 갈고리가 달린 막대기를 가로 대고 또 갈고리에는 줄을 얹어서 줄의 좌우 끝은 땅 위에까지 내려오게 합니다. 그런 연후 밤이 되면 등에다 불을 켜는데 많이 달때는 십여개의 등을 달고 적게 달때는 3,4개의 등을 매달아 놓습니다. 일반 민가에서는 아이들 식구 수대로 매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초파일이 되면 관청이나 상가, 민가 모두 등대를 세웠습니다. 등대는 주로 대나무로 만들며 높이가 낮으면 체면이 안선다고 생각하여 경쟁력으로 높게 만들었습니다.
등의 꼭대기는 꿩의 꼬리털로 장식하거나 소나무 가지를 붙들어 매고, 채색 비단의 깃발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깃발 바로 아래 부분에 가로 막대를 댄다음, 가로막대에 등을 걸 수 있도록 갈고리를 만들었습니다.

밤이 되면 등대에 걸어 불을 밝혔는데 집안의 자녀 수 대로 등을 매달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나무 여러개를 가로 엮은 등대에 수십 개의 등을 걸어 배의 돛배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일월권을 꽂아 바람에 따라 돌게 한다든지 혹은 길게 자른 종이를 수십발이나 되게 붙여 용이 날아가는 모양처럼 만들기도 했습니다.

민요와 수부희

초파일과 관련된 민요는 많습니다. 채록되어 남아 있는 여럿의 민요가 있는데 전남 무안 지방의 등타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월이라 초파일날 광등안의 안구대는 무슨 등이 걸렸는가
청등하고 황등하고 거북등에 자라등에 모기등에 생계등에 오만등이 다 걸렸네
둥글둥글 수박등아 노례기번들 엇다두고 저리 높이 걸렸는가
조각조각 마늘등아 채전을 엇다두고 저리 높이 걸렸는가
애무섭다 호랑등아 첩첩산중 엇다두고 저리 높이 걸렸는가

수부희란 초파일에 부르던 민속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장고라고도 하고 물박치기라고도 합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초파일 물동이에 물을 담고 그 위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빗자루로 두드리면서 소리를 내는 것을 물박치기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녀자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초파일날 물동이에다 물을 길어 등대 아래 떠다 두고 바가지를 엎어놓고 빗자루나 나뭇가지로 두드리며 놀았습니다.

빗자루로 박을 치면 둔탁한 소리가 나지만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치면 맑은 소리가 난다. 한손으로 막대기를 들고 한손으로 손가락을 치면서 장단을 치면 소박한 기악 반주가 되어 지금도 할머니들이 물박치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장단을 물박장단이라고 합니다.

잠두봉 관등놀이

잠두봉은 서울 남산의 북서쪽 봉우리를 말한다. 현재 서울타워가 있고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곳으로, 누에가 뽕을 먹기 위해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잠두봉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사대문 안이 한눈에 들어와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초파일 밤이 되면 서울 장안은 가가호호 거리마다 등대를 높이 세우고 등을 달아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불야성이 연출 되었습니다. 마치 맑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듯 가을 하늘 은하수처럼 사대문 안이 휘황찬란했습니다. 그 날이면 악기를 가지고 거리를 돌며 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초저녁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잠두봉에 몰려들어 불야성을 이룬 서울의 장관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관 때문에 시골에 사는 노인들은 잠두봉의 관등이 평생 소원이기도 해서 효심이 깊은 사람들은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남산을 오르기도 했고, 왕이 직접 관등에 참가하거나 미행으로 '관등'했다는 고사도 전해집니다.

조선 성종 때는 “한성십영”이라 하여 한성을 대표하는 열가지 경치로 종로의 연등 구경을 꼽았고, 강희맹은 종가관등에서 '하늘 위에 항성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한밤중 가는 곳마다 붉은 노울 감도누나...'라고 읊었으며 정이 오는 남산팔영에서 '사월파일 연등놀이 성대한데 승평 세월 얼마인가, 일반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밤새워 구경해도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인 줄 몰랐네'라 하였습니다.

음식

초파일에만 먹는 독특한 음식이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 행사의 일부가 초파일로 옮겨질 정도로 가장 큰 세시풍속 중 하나로 자리잡은 초파일이었지만 일반 명절과는 달리 육류나 어류를 쓰지 않고 소박한 음식을 마련하여 손님을 맞았습니다.

초파일에 마련하는 음식 중에는 유엽병이나 콩요리, 미나리 등이 있었습니다. 일명 느티떡이라고도 하는 유엽병은 연한 느티나무 잎을 따다가 쌀가루와 섞어 찐 설기떡입니다.
콩요리는 검은 콩을 깨끗이 씻어서 볶은 것입니다. 송나라 때 장원이라는 사람이 “오지”에서 '서울의 풍속에 부처의 이름을 외울 때 문득 콩으로 그 수를 세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월 초파일 석가모니 탄신일에 이르러 그 콩에 소금을 약간 치고 볶아서 길에서 사람들에게 대접함으로써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한다'고 한것으로 보아 우리가 얼마 전까지 간식으로 먹던 볶은 콩은 초파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초파일에는 미나리를 삶아 만든 미니라 강회 음식도 즐겼으며, 철쭉꽃 그늘 밑에 앉아서 꽃잎 한두 잎을 따서 준비해온 쌀가루와 섞어 전을 부친 꽃떡을 즐기며 담소하는 풍속도 있었다고 합니다.